뇌출혈로 쓰러지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아내가 병실 서랍에서 영수증 뭉치를 꺼내 보였습니다. 처음 입원한 대학병원 신경외과 병동과 옮겨 간 대학병원 재활의학과에서 받은 종이가 어느새 손바닥 두께가 되어 있었어요. 아내는 실비 청구를 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오른손을 못 쓰는 저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몇 달 동안 서류를 모으고 청구하며 배운 것들을, 같은 처지의 가족분들께 나누려고 적어 봅니다. 쓰러지던 날의 이야기는 마흔에 찾아온 뇌출혈, 현장에서 쓰러진 그날과 1년 넘은 재활 기록에 남겨 두었습니다.

병실 서랍에 쌓여 가던 영수증

입원 초기에는 실비라는 말이 머릿속에 아예 없었습니다. 살아남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만 생각했으니까요. 아내도 중간 정산서가 나올 때마다 계산만 하고 영수증은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어떤 영수증은 구겨져 있었고, 어떤 건 아이들 학교 안내문과 섞여 있었어요. 처음부터 봉투 하나만 정해 두었어도 훨씬 수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그 종이들이 나중에 돈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내 실비가 어떤 상품인지 몰랐습니다
막상 청구하려니 제 실비가 어떤 조건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래전에 들어 둔 보험이라 증권도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웠어요. 아내가 보험사 고객센터에 전화해 가입 시기와 보장 내용을 하나씩 물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실비도 가입 시기에 따라 내가 내는 몫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보험을 들 때 대충 넘긴 설명이 몇 년 뒤 이렇게 중요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아내는 통화 내용을 공책에 꼼꼼히 받아 적었고, 그 공책이 이후 모든 청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처음 청구에서 빠뜨린 서류
첫 청구는 영수증 사진만 찍어서 보냈습니다. 며칠 뒤 보험사에서 서류를 보완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입원 기간이 길고 금액이 커서 진단명이 들어간 입퇴원 확인서와 세부내역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다시 처음 입원했던 대학병원 원무과에 가서 서류를 떼야 했습니다. 아이 다섯을 친정에 맡기고 버스를 갈아타며 오간 하루였습니다. 돌아온 아내가 미리 물어볼 걸 그랬다며 웃었지만, 그 웃음이 많이 지쳐 보였습니다. 그 뒤로는 청구 전에 보험사에 필요한 서류부터 묻는 것이 저희 집 규칙이 되었습니다.
진료비 세부내역서라는 종이

세부내역서를 처음 받아 봤을 때 아내도 저도 놀랐습니다. 영수증에는 합계만 있었는데, 세부내역서에는 날짜별로 어떤 검사와 치료를 받았는지 줄줄이 적혀 있었어요. 급여와 비급여가 나뉘어 있어서 실비에서 무엇을 계산하는지도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제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입원 초기의 며칠이 그 종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페이지를 한참 동안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세부내역서는 청구용 서류이기 전에 저희 가족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재활병원으로 옮기며 생긴 일
대학병원에서 다음 병원으로 옮길 때 원무과 직원분이 실비 청구할 거면 서류를 지금 다 받아 가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 말 덕분에 전원하는 날 이전 병원 서류를 한 번에 챙길 수 있었어요. 재활병원에서는 매달 중간 정산 때마다 영수증과 세부내역서를 같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달씩 끊어서 청구하니 병원비를 먼저 내는 부담도 조금 덜했습니다. 제가 쓰러진 뒤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 달 한 달 들어오는 보험금이 생활비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병원을 옮길 계획이 있다면 퇴원 전날 원무과에 꼭 들러 보시길 권합니다.
간병비는 실비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크게 실망한 건 간병비였습니다. 처음 석 달은 아내가 곁을 지켰고, 그 뒤로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아내 대신 간병인 선생님께 저를 부탁했는데, 그 비용이 대략 병원비 못지않았어요. 당연히 실비로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간병비는 치료비가 아니라서 제 실비에서는 보상이 안 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따로 간병 특약을 들어 두지 않은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험을 점검하시는 분이라면 간병비 보장이 있는지 한 번쯤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상한제 환급 안내를 받았을 때
쓰러진 다음 해에 건강보험공단에서 본인부담상한제 환급 안내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공돈이 생긴 것 같아 반가웠어요. 그런데 보험사에 물어보니 제 약관에서는 환급받는 부분은 실비와 겹쳐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실비로 받은 금액 가운데 일부를 정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환급금 통지서와 보험사 지급 내역을 나란히 놓고 보니 그제야 구조가 이해됐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덜 당황했을 것 같아서, 환급 안내를 받으면 보험사에도 꼭 알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받은 돈과 못 받은 돈
몇 달 치를 정리해 보니 받은 돈과 못 받은 돈이 또렷하게 갈렸습니다. 저희 경우 급여 항목의 본인부담금은 자기부담금을 뺀 대부분이 돌아왔고, 비급여 가운데 일부는 약관에서 빠졌어요. 대략 따져 보면 입원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실비가 메워 준 셈이었습니다. 반면 간병비와 서류 발급비, 보조기 일부는 고스란히 저희 몫이었습니다. 숫자로 정리하고 나서야 어디에서 돈이 새는지 보였고, 그 뒤로는 비급여 치료를 권유받으면 먼저 실비가 되는지부터 물어보게 됐습니다.
왼손으로 앱을 눌러 본 날

재활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청구만큼은 제가 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왼손 엄지로 보험사 앱을 누르는 건 생각보다 느렸고, 사진이 자꾸 흔들려 몇 번이나 다시 찍었어요. 그래도 접수 완료라는 화면을 봤을 때 오랜만에 가장 노릇을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병원 기록을 보험사로 바로 보내는 실손24도 써 봤습니다. 다니던 병원이 연계되어 있으면 종이 없이 청구할 수 있어서 훨씬 편했습니다. 연계되지 않은 병원은 여전히 서류를 찍어 올려야 해서, 앱에서 병원 이름부터 검색해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외래 재활로 바뀌고 나서
퇴원하고 외래로 재활을 다니면서 청구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통원 치료는 한 번 갈 때마다 공제되는 금액이 있어서, 하루 치 영수증만 보면 받을 돈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영수증을 모았다가 한 번에 청구했습니다. 월·수·금은 재활병원, 화·목은 대학병원으로 주 5일을 다니다 보니 한 달이면 제법 쌓였습니다. 소액이라고 그냥 버리지 말고 모아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럴 땐 혼자 고민하지 마세요
청구하다 보면 거절이나 감액 통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한 번은 일부 항목이 빠진 채 지급되어 이유를 몰라 답답했어요. 그럴 때는 전화로 끝내지 말고 지급 내역과 거절 사유를 문자나 서면으로 받아 두는 게 좋았습니다.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안 되면 금융감독원 민원이나 분쟁조정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그리고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면 서류는 미뤄 두고 병원부터 가셔야 합니다.
아내가 만든 파란 파일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아내는 파란 파일철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병원별로 칸을 나누고, 달마다 영수증과 세부내역서, 청구한 날짜와 받은 날짜를 적은 메모를 끼워 두었어요. 둘째가 색깔 스티커를 붙여 주어서 파일철이 제법 알록달록해졌습니다. 지금도 외래 진료를 다녀오면 그 파일철부터 펼칩니다. 이 작은 습관이 저희 집 병원비 걱정을 꽤 덜어 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 파일이라며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3년이라는 기한
보험금은 3년 안에 청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기한 안이었지만, 정신없던 첫해의 외래 영수증 몇 장은 끝내 찾지 못했어요. 쓰러진 직후에는 가족 누구도 서류를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막 입원한 가족이 있다면 영수증 봉투 하나만이라도 정해 두시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몸이 조금 나아진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영수증만 남아 있으면 나머지 서류는 대부분 나중에 다시 뗄 수 있습니다.
마치며
실비 청구는 돈 이야기 같지만, 저희에게는 쓰러진 뒤의 시간을 하나씩 정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서류를 모으며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새삼 알게 되었어요. 보상 범위는 가입한 상품마다 다르니 꼭 보험사에 직접 확인하시고, 건강보험에서 먼저 줄일 수 있는 비용도 함께 챙기시길 바랍니다. 비급여 치료와 실비 이야기는 도수치료 11만 원이 4만 원으로, 7월부터 달라진 것 글에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확인처: 금융감독원, 금융감독원 파인, 국민건강보험공단
※ 이 글은 저의 경험이며 보험 상담이나 진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보상 여부와 금액은 가입한 상품의 약관에 따라 다르니 보험사와 금융감독원에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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